그림에 대해 언제나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저했다. 이미 그림이라는 ‘특수한 말’을 하고 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말’로 생각을 내뱉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이처럼 그림에 되도록 첨언하지 않고자 함은 비단 나만 가진 마음은 아닐 것이다. ‘말의 방식’이 아닌, 시각적으로 보는 이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감각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그림의 방식’은 말과 이론으로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고자 하는 행위를 일단 멈추게 만든다.
하지만 말은 불가피하다. 말은 늘 미끄러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데 실패하지만, 불확실한 의미와 싸워 새로운 각도에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 맺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림에 덧붙여진 말은 단순히 그림을 보족하지 않는다. 그리는 이는 ‘말’을 통해 관념을 개진하고, 표현의 형식을 가다듬으며 언어의 불가능성을 딛고 새로운 형상을 피어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림에 ‘덧붙여진 말’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과도한 의미의 세계에서 소멸해가는 감각적 삶을 비출 때 가능하다. 이는 이론이 감각적 삶 위에 놓이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넘어, 관념과 감각을 손쉽게 대비시키지 않는 것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화가에게 그림은 본질적으로 탈 시대적인 매체이다. 화가의 시선은 과거의 미술과 현재의 관점을 선형적으로 배치하지 않는다. 화가는 과거의 그림을 제 것으로 삼아 소화한다. 표면만 핥아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씹고 삼켰다가 다시 뱉어낸다. 화가는 단지 과거의 그림에서 찾아낸 형식들을 인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과거의 또 다른 화가들의 시선을 좇으며, 그들이 그림 안에 포개 놓은 내밀한 시선이 어떻게 암시되었는지 현재의 시점에서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화가는 그림 안에 서로 다른 시간성들이 얽히고 교차하는 다층적 시간성을 인식하며 시선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이 시선은 회화사 전체를 조망하고 시대를 넘나들며 무시간적 배열/배치를 통해 자신만의 계보를 만들어 낸다. 나는 이것을 ‘화가의 계보’이자 ‘감각의 계보’라 부른다.
누군가 동시대 회화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포스트-미디엄의 조건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 중 하나일 뿐이라거나, 과거 모더니즘적 매체 특정성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회화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낡은 구별만 남긴 채, 회화의 매체성과 개념적 측면의 어긋난 대립을 상징하는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회화는 매체로서 자신의 역사를 끊임없이 소환하며 자신을 갱신한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으로만 치환되지 않는 ‘그림의 장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림 자체에 내재하여 의미 작용을 발생시키는 이 ‘장치’는 색채와 형상, 시간과 공간의 유형과 범주, 사물의 배치 등의 교차된 결합을 통해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그림은 한 시대의 경험적 표현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인식하기 힘든 선험적 개념들을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선취해 내며 시대를 넘어선다.
한편, 물질적 기호이자 매체인 그림은 이해 가능한 서사나 재현을 통하지 않고도 붓질의 힘으로 보는 이를 매혹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림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동양의 화론에서 말하는 기운생동 氣韻生動처럼 붓질을 통해 단지 물리적 감각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본질적 형상을 포착하여 비가시적 구조를 드러낸다. 내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론적 힘은 그 자체로 ‘그림의 힘’이 된다. 내면의 형상이 직관에 의해 감각적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논증할 수는 없지만, 잠재태 속에서 무엇인가를 형상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삶의 형태’를 질료로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 그림이 시대를 넘어섬과 동시에 시대와 공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과 생을 들여다보며, 삶의 탁월한 형태들을 도출해 냈기 때문이다. 그림의 본질은 추상화된 의미의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가 ‘형태의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최근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마 비슷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매체의 형식 언어 속에서 그림의 수사적 표현을 빈번히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수사학이 작동하는 과정과 매체 간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은 다소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그림의 확장 가능성은 매체성을 극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문법이 지니는 유연성을 탐구하는 데 있을 것이다. <화가의 말> 역시 그림의 복합적 측면과 화가의 관점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말’에 대한 갈증에서 시작했다. 화가의 주체성에 대해, 화가 자신의 수행성의 문제기도 한 붓질에 대해, 그리고 화가에게 ‘손’이라는 인식 기관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동시에 회화의 형식적 언어와 물질성, 상징적 문법, 수사적 측면, 나아가 정치성 및 시대 정신이 화가의 삶과 맞물려 생물체처럼 약동하는 그림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림에 대한 명료한 논증으로 이루어진 화론畫論이 아닌, 말의 생동감과 일렁임, 비틀림을 통해 삶의 균열을 담아내는 화언畫言으로 그림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논증에 미달하는 단상과 감정의 파편들을 서신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내다 보니 그림에 대한 이율배반적 말들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본디 그림은 이율배반적이다. 그림은 조화로운 것이 아니라 불화不和와 불일치로 점철되어 있기에, ‘그림과 같은’이라는 균형과 조화를 뜻하는 말은 오히려 그림의 본질과 가장 거리가 먼 말이 될 수 있다.
<화가의 말>이 불화하는 감각들을 증폭시키는 그림의 심연에 다가간 발언發言이길 바라며, 그간 나눈 말들이 단순히 예술가의 서정을 담은 ‘미술스러운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체제를 내파하는 파열음이 되길 바란다.